요즘 저는 집구석에서 하릴없이 섀도 복싱을 하면서 이 소리는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며 신이 주신 금쪽같은 시간을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날려버리는가 하면, 막 배우기 시작한 기타를 반주 삼아 ‘오빠 생각’을 부르면서 이 노래 소리는 도무지 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며 인간이라면 낼 수 없는 파열음으로 또 한 번 그 신성한 시간을 두 동강 내버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제 아버지가 명예퇴직을 하셨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헬로비너스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다 들켜, 나도 울고 아버지도 울고 아버지가 PC방이나 가라며 쥐여주신 만원짜리도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topclass〉에서 글을 한번 써보라며 지면을 내줬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인터뷰 전문 잡지 〈topclass〉에서 저한테 이 지면을 맡긴 건 ‘그래, 이런 사람도 사는데 당신들도 살아’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 받았습니다. 아차, 저는 박정민입니다.

2011년 〈파수꾼〉이라는 독립영화로 데뷔해, 얼마 전 개봉한 〈전설의 주먹〉이라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강우석 감독님의 영화에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황정민 형님의 아역을 연기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와 같이 낄낄대며 보던 〈투캅스〉, 친구들과 보고 나오면서 서로가 서로를 ‘개똥파리 같은 새끼’라고 부르게 만든 〈공공의 적〉, 비겁한 변명의 최후를 가르쳐준 〈실미도〉까지. 이외에도 세상에 수많은 작품을 내놓으신 강우석 감독님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신인 배우로서는 매우 놀랍고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지면도 받아냈으니 감독님 집에 보일러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연기를 해보겠다고 극단에 들어간 게 2005년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겉멋만 잔뜩 들어 당장 장혁 같은 유명 배우가 될 것 같았(던 한 청년은 바로 그 장혁이 제대하던 2006년 입대합니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극단 형과 함께 포스터를 붙이다가 궤변을 들었습니다.

“너 같은 놈 많이 봤어. 발 좀 담그는 척하다가 다 없어져.”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지만 그 형이 싸움을 잘해서 참았습니다. 이후 배우가 되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마다 그 형의 말을 되새겼습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그러고 보니 연기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잘한다, 최고다라는 말보다 어쩌면 그 말이 더 큰 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니까 어서 주변 후배들에게 지금 당장, 네가 하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일 집어치우라고 말해주세요. 그럼 그 후배들은 당신을 증오하며 언젠간 당신을 밟고 일어설 겁니다).

그렇게 8년이 지나 어릴 적 그토록 열광하던 감독님들을 만나고, 무턱대고 좋아했던 배우들이 이름을 불러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직은 조무래기지만, 비실비실하던 촌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담으로 충남 예산 출신인 우리 엄마는 <넝쿨당>을 볼 때마다 당신 친구가 유준상 사촌 형이라며 내 귀에 캔디가 박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다 못한 제가 “엄마 내가 시사회 때 유준상 소개해줄게!”라고 했더니, 엄마는 “아이고 우리 아들 최고다. 뭐 입고 가야 되니?”라고 하셨습니다. 시사회 날 엄마는 예쁘게 차려입고 유준상 선배에게 다가가 단호하게 “내 친구가 그쪽 사촌 형이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유준상’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행복했을 겁니다.

음, 어쨌거나 저는 앞으로 30년 정도 더 이쪽에 ‘발 좀 담그는 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막판에 기적 같은 버저비터를 넣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같은 일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기적’. 그리고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주인공의 말을 빌려, 어차피 “평생 동안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해야 할 때가 그리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라면 조금은 즐기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저는 보통 사람보다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잘 날리고, 보통 사람보다 헬로비너스 노래를 맛깔나게 부를 줄도 압니다. 또 어느 순간 필사적으로 살다 보면 엄마 친구가 레이디 가가의 작은 아버지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분명 이 글을 보신 여러분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찾아올 겁니다. 매주 3000원이나 5000원을 투자해 내 손 안의 작은 행복, 6개의 아름다운 숫자를 지니고 다녀도 좋고, 언젠가는 소녀시대 중 한 명과 꼭 결혼할 거라는 자신만의 ‘자긍심’을 지니고 다녀도 좋습니다. 다만, 기회가 왔을 때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기적 같은 장미칼 하나 정도는 날카롭게 갈아놓으시길 바랍니다.

다 잘될 겁니다.

 

 

-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2013년 07월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