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요즘 트렌드를 생각하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꼰대로 취급받거나 다소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라는 책에서 한 말인데,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로 최근의 ‘하지 말고 놀아’ ‘대충 살아’ ‘게으르게 살자’ 류의 트렌드에 정면으로 반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삶의 성실성이 아닌 나태함에서는 결코 삶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꼰대’스럽다.

그는 인간이 ‘진정한 자발성’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발적 활동이란 고립이나 무기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활동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행동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동인형 같은 순응주의자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이란 (...) ‘자유의지로’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발적 활동’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성’과 ‘본성’이 통합된 ‘전체 인격’으로 사는 것이라 말한다. 나아가 그 핵심에는 “창조로서의 노동”이 있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일하는 삶도 비자발적인 삶이다. 자발적인 삶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실제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진정으로 사는 것이라 한다. 덧붙이자면,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환희와 기쁨, 매력을 느끼는 건 어린 아이들이 가진 ‘자발성’ 때문이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시인이자 예술가다. 언어를 창조하고, 자유롭게 그림그리며, 다양한 놀이를 자신의 힘과 자발성으로 즐긴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자발성을 얻고 싶어서, 어린아이에게 빠져든다.

나아가 우리가 아무리 나태함을 찬양하고, 자발성을 부정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는 자발적인 경험을 사랑한다고 한다. “어떤 풍경이 아름답다고 자발적으로 느낄 때, 고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틀에 박히지 않은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느꼈을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솟구쳐 오를 때” 우리는 ‘자발성’이란 무엇인지 예감한다. 삶 전체를 오로지 자발성으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자발적인 경험의 기쁨을 알고 있고,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토록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고립감, 고독의 공포, 박탈감을 이겨내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립과 좌절로 생긴 회의감이라는 것도 자발적으로 사는 순간 사라지며, 스스로 자기 삶의 완성을 위해 사는 창조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삶의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이겨내는 비결 같은 것으로 ‘자발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박탈감, 외로움, 절망감, 우울감, 고립감, 회의, 냉소 등에 가득 차 있는 시대가 지금의 우리 사회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여러 해결방안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 말대로 ‘금융치료’로, ‘입금’으로, ‘456억’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모든 문제가 하나의 이유, 하나의 방법만이 있을 리는 없다. 또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맹신하는 해결책이 반드시 유일한 만병통치약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러면, 하나뿐인 우리 삶을 놓고 약간의 배팅을 해볼 수 있다. 자발적인 삶이라는 걸 어떻게든 살아내보기 위한 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마치 해결책은 ‘456억’에 있다고 믿고 생사를 건 게임을 하는 어느 게임의 참가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도 배팅을 한다면, 그런 쪽으로 배팅을 해보고 싶다. 삶을 가능한 한 농도 짙은 자발성으로 채워보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 거기에 배팅을 해보고 싶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3705

[인터뷰] ‘다른 문화, 다른 사고방식, 다른 삶에 관하여’,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코세이지 감

마틴 스코세이지의 최근 필모그래피는 그가 평생 만들어온 백인 남자 중심의 영화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에 가깝다. <좋은 친구들> <카지노>의 갱스터들은 어느덧 노년이 되어 <아이리시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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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라는 새로운 시도



- 지난 몇년간 영화를 만들면서 얻은 교훈이 있나. 이번 작품을 통해 시네마에 대해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면.

배우기 위해서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무빙 이미지에 대한 열정과 카메라의 움직임, 컷, 고정된 롱테이크 같은 것들을 통해 영화의 모든 면을 탐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아무리 자료 조사를 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도 영화라는 유기체가 어떤 성격을 지니게 될지 우리는 예상할 수 없다. 우리가 이야기를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시각적이고 구술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편집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컷을 자르거나 혹은 자르지 않거나, 카메라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카메라워크는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어떻게 찍고 편집할지 미리 정하고 예전에 했던 것을 반복하기보다는 스토리와 실제 로케이션, 캐릭터가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느끼며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좋은 친구들>에서 코파카바나가 레스토랑에 입장할 때 보여준 롱테이크를 이후 다른 작품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분노의 주먹>을 만들던 당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초심으로 돌아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코미디의 왕>을 찍었다.

- 최근 당신이 만든 영화들은 러닝타임 3시간30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대중성을 위해 2시간짜리 영화를 다시 만들 생각은 없나.

러닝타임은 스토리에 따라 달라진다. <아이리시맨>이나 <플라워 킬링 문>은 무척 복잡한 이야기다. 우리에게 필요한 전개 방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러닝타임은 필요했다. 만약 2시간에 걸맞은 스토리를 고안해낸다면 그 길이에 맞춘 영화를 만들 것이고, 90분짜리 영화나 4시간짜리 영화도 찍을 수 있다. 집에서 5시간씩 TV시리즈를 보고, 3시간30분이 넘는 연극을 보기도 하는 시대다. 성숙한 관객들은 연극이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왜 사람들이 극장에서 3시간30분짜리 영화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긴 영화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영화가 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영화야말로 극장에서 봐야 한다.


- 당신은 여전히 꾸준히 작품을 만들며 시네마와 호흡하는 감독이다. 창작자로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호기심이 많고, 다양한 분야를 궁금해하며 살아왔다. 나는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학을 좋아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젊은 작가와 나이 든 작가들을 새로이 발견하고, 고전영화든 새로운 영화든 내가 발견한 것을 젊은이들과 공유하며 그들을 흥분시키고 무언가를 얻어가게 하고 싶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영화 제작자라기보다는 선생에 가깝다. 새로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엔 영화도 책도 그림도 음악도 춤도 건축도 있고, 우리는 기꺼이 매료될 수 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지쳐갈 때조차 5~6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플라워 킬링 문>을 만들면서 <데이비드 요한슨:퍼스널리티 크라이시스>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사실 데이비드 요한슨이 소개해준 많은 곡들이 <플라워 킬링 문>에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음악의 핵심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로비 로버트슨이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캐나다의 모호크족 출신이기에 그 자신에게도 <플라워 킬링 문>은 무척 특별한 프로젝트였다. <플라워 킬링 문>을 만들면서 다른 토착민들의 음악과 이름, 움직임에 대해 배우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나는 이 영화의 모든 측면들, 이를테면 오세이지족의 이름, 문화, 장례식, 결혼식 등 모든 것을 재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다른 문화를 배움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 수 있다.

- 극장영화의 위기를 논하는 시대다. 올해 <오펜하이머>가 슈퍼히어로영화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현상이 할리우드 산업에 무엇을 시사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뉴욕에서 살고 있고 주류 할리우드와 멀어진 지 오래됐다. LA에 가면 몇몇 친구들 외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진다. 아직 두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연달아 흥행한 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고, ‘퍼펙트 스톰’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요소가 적시에 모여들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다시 극장에 가게끔 만들었다. 한편 최근 독립영화는 지난 20년간 나온 작품들과 또 다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작은 스크린에서만 상영된다는 점 때문에 늘 화가 난다. <플라워 킬링 문>은 큰 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인데, 그냥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뿐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며 제작하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큰 스크린에서 봐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TV 앞에 앉아 5시간 동안 볼 수 있는 시리즈가 있고, 3시간30분 동안 상영되는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지 않나. 연극을 존중하는 것처럼 영화도 존중해줬으면 한다. 극장에서 <플라워 킬링 문>을 보면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네?”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지난 16일자 A12면 '서울대 게시판의 신림동 비하 논쟁' 기사를 읽었다.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게시판에 '신림역 근처엔 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사람이 많죠?' '패션과 외모, 머리 모양 등이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하나' '글쓴이는 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폄하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자 '왜 선비인 척하느냐' '신림역에 모이는 사람들이 저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졸업생으로서 무심할 수 없었다. 다만 전제할 것이 있다. 마치 서울대생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왜곡이다. 그리고 '서울대생'의 의견이라고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도 난센스다.

 

 

  젊은 세대 일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먼저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fact·사실)는 팩트다' '개취(개인적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취향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 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 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 횡행하는 '선비질'이라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1차대전 패전 후 독일인들은 막대한 배상금 부담에 시달렸다. 이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태인의 열등함, 사악함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며 아리아인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까지 주장했다. 그들 마음속 심연에는 지금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은 본능이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이웃들을 대량 학살하고 그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능이다. 여성 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능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 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인 우리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만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6/2014062604729.html

 

[조선일보를 읽고]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조선일보를 읽고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www.chosun.com

 

 

장강명 소설가

 

 

 

젊었을 때는 잘 어울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만남이 뜸해진 또래들이 있다. 딱히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상대와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 그들이 내가 잘 모르는 자녀 교육 문제나 골프 얘기만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모르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소설가라는 직업 특성상 소재를 얻기 위해서라도 더 들으려는 편이다.

나이를 먹고 소설가라는 직업을 지녔기 때문에 내가 젊을 때보다 사람을 더 예리하게 본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니 다른 분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 정도로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를 먹고 소설가라는 직업을 지녔기 때문에 타인을 보는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의 속도보다 깊이가 매력
지성·주관도 근육처럼 키워야
콘텐트 없음도 주름만큼 잘보여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나이를 먹으면서 상대의 외모에 덜 휘둘리게 됐다. 상대의 간판에도 영향을 덜 받는다. 이제 와서 미남미녀들이랑 내가 연애를 할 것도 아니고, 인상 안 좋지만 성실한 사람, 간판 좋지만 일 못 하는 사람들도 그간 꽤 만났다. 남이 걸친 옷이나 장신구에 대해서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무지하다.

 

 

대신 그만큼 상대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됐다.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화술이나 목소리도 풍미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결국 흥미로운 생각을 품은 사람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생각을 품은 사람이 무척 드물다. 뻔한 생각을 하거나 별생각이 없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독특한 사람, 괴짜가 좋다는 말이 아니다. 특이한 취향을 가졌지만 그 취향에 대해 질문을 몇 번 던지다 보면 금세 밑천이 바닥나는 사람도 있다. “그냥요”나 “잘 모르겠어요”로 설명이 끝난다. 관심사라는 좁은 영토를 외부인의 눈으로 살핀 적이 없고, 몇몇 균열 지점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특이한 취향을 가졌고 동시에 별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대가 해당 분야에 백과사전적인 지식이나 오타쿠 같은 열정을 지녔다고 해서 내 눈에 더 매력적으로 비치는 건 아니었다. 열정적인 괴짜구나 싶었을 뿐. 독특한 의견도 마찬가지다. 독특한 의견의 근거를 제 논리로 설명 못 하고 “유튜브에서 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끌리는 게 아니라 무서워진다.

 

반면 잡학에도 깊이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내가 끝내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지만 경청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주제를 다양한 맥락에서 검토했고, 한 측면을 추상화하여 전혀 다른 범주에 있는 다른 사건과 유연하게 잇는 능력이 있으며, 메타인지도 확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지성과 주관에 경험까지 더해진 사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그런 이들을 “콘텐트가 있다”고 표현한다. 콘텐트가 있는 사람과 대화하면 재미있다. 대화만으로 뭔가를 배운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잠깐일지라도 덕분에 어떤 정신의 전망대에 올라 새로운 풍경을 즐기는 시원함을 맛본다. 편집자들은 그런 인물들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에세이 출간을 제안하곤 했다.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던 것 같다. 이제 순발력이나 발랄함에 지적인 흥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을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오가는 이야기들이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최악은 “우리 그때 재미있었지” 하면서 옛날얘기를 되풀이하는 부류다.

 

내 관찰로는 영리한 청년이었다가 내용물 흐릿한 중년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30대를 버틴 것이다. 정신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훈련은 근력 운동과 흡사하다. 어린아이의 몸을 보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20대도 어느 정도 그렇다. 하지만 40대는 체형을 보면 평소에 운동을 얼마나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티가 난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운동 부족이 몸의 병이 되어 돌아온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20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4050 책의 해’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1년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었다는 사람의 비율이 20대에서는 78.1%, 30대는 68.8%였는데 40대는 49.9%, 50대는 35.7%에 불과했다. 중년들이여, 책을 읽자. 주름 제거 시술보다 시급하다. 콘텐트 부재도 주름만큼 훤히 보인다.

장강명 소설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1306#home



'여적여'말고... '살아있는' 소녀들을 보고 싶다



일단 소녀 주인공이 스포츠에 입문하는 계기부터도 문제적이다. 소녀들은 스포츠를 향한 열정이나 자아실현, 출세욕이 아니라 가정 문제 때문에 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으로 유명해져서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거나 오빠가 진 거액의 빚을 대신 갚고자 한다.

이는 1980년대에 TV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끌었던 <달려라, 하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달려라, 하니> 1화는 중학생 하니가 아버지, 새엄마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하고 혼자 옥탑방을 얻는 것으로 시작한다(홍두깨 선생이 찾아와서 김치를 담가주기도 한다). 구전설화에서부터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온, '딸을 핍박하는 가족 플롯'이 스포츠 만화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설정까지 추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운동을 시작한 주인공은 수순처럼 악녀 라이벌과 만난다. 악녀들은 부유하고 예쁘지만 인성에 결함이 있는 소녀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곤 주인공에 집착하기, 질투하기, 주인공의 남자에게 눈독 들이기, 지고 나서 분노하기가 고작이다(나는 지금도 나애리가 왜 '나쁜 계집애'인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에이치투의 두 소년이 라이벌이면서도 담대한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과 비교하면 소녀 주인공과 악녀의 관계 설정은 너무나 얄팍해서, 여성의 우정을 폄하하려는 음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소녀를 내세운 스포츠 만화는 성장보다 그가 겪는 고생과 악인의 음모, 로맨스에 더 집중한다. 또 주인공이든 들러리든 간에 상관없이 운동하는 소녀의 몸은 성적으로 소비된다.

나의 바람은 좀 더 인간적이고 진지하고, 무엇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녀 주인공들을 보는 것이다. 그를 선망한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기까지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슬램덩크의 인기가 또래 남자아이들을 농구 열풍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바일 게임과 SNS의 시대에도 살아남은 저력이라면,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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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하니' 나애리는 왜 나쁜계집애였을까

[운동하는 여자 ⑩] 스포츠 만화와 소녀들 [오마이뉴스 양민영 기자] ⓒ unsplash 지금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된 90년대에,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만화로 접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운동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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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비슷한 양상인데, 혐오 프로파간다로 세상이 우경화되고 있어요. 여자아이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많은 것을 알아가는데, 일부 어리석은 이들은 우경화됐죠. 그런데 그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똑똑해져야 흐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어요. 학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돼야 해요. 장성한 사람의 뇌를 바꾸기는 너무 어려우니까요. 연산만 가르치거나 답을 외우게 하는 게 아니라 질문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정보를 들으면 왜 이 정보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이걸 통해 이익을 얻는 집단은 누군지, 그래서 이 정보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있어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있으니까 더 우려가 돼요.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아이들이 미래 사회 지도층이 될 텐데, 이들이 지도층이 된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 끔찍한 일이에요.”

김윤아는 이렇게 말했다. 이선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동조했다. 김진만은 “좋아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사회의 기조라고 할까, 그게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세상이다. 분노와 혐오가 차곡차곡 쌓이며 몸집을 키운다. 김윤아는 다르다. 당한 폭력만큼 세상에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영화에서 어릴 적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오랜 기간 가정폭력을 당했음을 고백한다. 지난해 초 예능 프로그램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정서적 학대와 신체적 학대를 매일 당했다는 그는 성장해 세상에 위로를 건네는 뮤지션이 됐다. 방송을 통해 남편 김형규와 함께 평등하고 다정한 가정을 꾸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폭력을 전이시키거나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김윤아는 “저는 학대의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라고 생각한다”며 “그 경험이 저를 나쁜 방향으로 가도록 만들지 못했다. 이 형들을 만나 음악을 직업으로 삼지 못했다면 나쁜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음악을 할 수 있었기에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21904

다큐 영화 주인공된 자우림 “세상이 점점 나빠져도 우리는 계속 노래한다”[인터뷰]

1997년.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영화 주제가가 인기를 얻는 일이 있었다. 영화 <꽃을 든 남자>의 ‘헤이 헤이 헤이’다. 홍대 인디클럽 블루데빌에서 ‘미운 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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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몇년 전 하와이에 살 때의 일이다. 연구실과 집이 있었던 마노아에서 호놀룰루 해변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다. 하와이로 이사하고 현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서핑이었다. 전세계 서퍼가 하와이의 파도를 동경한다는데 고작 10분 거리에 살면서 서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핑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탈 만한 파도가 오는 시간과 장소를 잘 골라 자리를 잡는다.(대개 이미 서퍼들이 와글와글 와 있다.) ②보드 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린다. ③잡아야 할 파도가 오면 보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파도와의 거리를 살피며 팔을 저어 속도를 낸다. ④제대로 보드에 속도가 붙어 파도가 보드를 치는 순간 보드 뒤쪽이 들리는 움직임을 느낀다. 이때 상체를 들면 보드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때 일어나야 한다. ⑤여러분이 상상하는 서핑 모습이다. 제대로 파도를 잡았다면 이제 옆으로 가든 앞으로 가든 파도를 즐기면 된다.

보통 초보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③번이다. 파도와 나의 간격을 살피며 팔을 저어 속도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속도가 붙지 않으면 파도의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해 파도가 보드를 꿀렁하고 넘어가버린다. 이를 두고 서퍼들은 ‘파도를 놓친다’라고 한다.

코치와 함께 매주 주말 이틀은 바다로 나갔다. 초보자인 내가 파도를 스스로 잡아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파도에 맞춰 보드 속도를 내려면 코치가 뒤에서 밀어줘야 했다. 이 힘이 더해지면 파도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연습을 수도 없이 하면서 3개월쯤 지나가자 코치 도움 없이 혼자서 파도를 탈 수 있게 됐다. 신이 났다. 조금만 더 하면 이제 오는 파도는 죄다 잡아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해 질 녘, 파도 상태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나 신나게 바다로 나가 파도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힘 좋은 파도가 오고 있었다. “이건 내 거야”라고 외치며, 몸을 돌려 힘차게 팔을 저어 보드의 속도를 높였다. 보드 뒤가 파도에 맞아 들리자, 상체를 들었다. 보드가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았는데, 웬걸. 파도가 꿀렁하고 보드를 넘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파도를 놓친 나는 힘없이 바다에 몸을 던지곤, 보드에 매달려 울상을 지었다. ‘분명 잡을 수 있었던 파도였는데, 아직도 연습이 부족했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 옆에서 파도를 기다리던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다.(하와이에서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대 서퍼를 볼 수 있다.) 할아버지는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파도는 기다리면 또 와. 놓쳐도 놓쳐도 파도가 다시 온다는 것이, 서핑의 가장 아름다운 점이지.”

그 뒤 석달쯤 지나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핑은 삶을 닮았다. 파도를 잡아타는 그 순간을 위해 보드를 이고 지고 바다에 나가고, 파도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팔을 저어 저 멀리 파도가 있는 곳까지 가고, 나의 파도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파도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수십개의 파도를 놓치다 보면 결국엔 나에게 잡혀주는 파도가 하나쯤은 있고….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지 않은 이상, 더는 주말 서퍼 노릇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연구가 마음같이 풀리지 않는 어느 새벽, 하와이의 눈부신 바다를 생각한다. 서핑의 정점은 멋지게 파도를 잡는 순간이 아니라, 파도를 계속 놓치며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순간에 있었다. 내 연구의 정점도 문제를 푸는 순간이 아니라,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중에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 볼 일이다. 기다리면 다음 파도가 오고, 그걸 놓치면 그다음 파도가 온다. 바다에 머무는 시간만큼 만나는 파도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이번 파도를 놓쳤다면, 다음 파도는 나의 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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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굳이 알 필요 없는 것을 모르는 행복 | 중앙일보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2019년의 행복 수준이 우리가 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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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것들이 마음의 영토를 속속 점령해가는 동안, 우리는 저항은커녕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그들을 환대하고 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처럼 세상은 가십과 스캔들을 지극 정성으로 환대하고 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세상의 모든 소식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순간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실시간 이슈들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2019년 행복 수준, 2018년보다 낮아져



실력은 알아야 할 것들을 알수록 커진다. 그러나 행복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를수록 커진다. 대한민국의 행복을 매일매일 측정하고 있는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2019년은 2018년에 비해 행복의 모든 지표가 나빠졌다. 스트레스가 증가했고, 삶의 만족도는 하락했으며, 일상의 기분은 불쾌함이 늘어났다.

2018년과 2019년의 행복 격차는 평일과 주말의 행복 격차만큼이나 컸다. 2019년의 행복 수준이 우리가 평일에 경험하는 행복이었다면, 2018년의 행복 수준은 우리가 주말에 경험하는 행복 수준이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마는 특히 2019년에는 우리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버닝 썬 스캔들로 인해 우리는 일부 연예인의 사적인 대화 내용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배우자와 자녀와 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친구 가족의 이름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 싶은 검사들의 이름도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되었다. 누가 누구의 라인인지, 그가 어느 부서에서 어느 부서로 좌천됐는지도 알게 되었다.



마음의 여백을 사라지게 하는 것들



그렇게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면서 정신적 고통과 관계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고,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해 비워놓아야 할 마음의 여백이 사라졌다.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왕성한 활동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앉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결코 서 있지 않고, 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결코 앉아 있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마음도 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마음의 힘을 비축하는 행위다. 유일한 대화 주제가 가십과 스캔들뿐인 사람을 멀리하는 것도 마음의 힘을 축적하기 위한 행위다.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알 가치가 없는 내용들을 폭로하는 사람들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아야 한다.

마음은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대상이다. 자연만큼이나 지켜내야 할 대상이다. 마음은 결심 한 번으로 바뀌는 대상도 아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마음속 찌꺼기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 접속은 하루 세 번이면 충분하다. 밥 먹는 정도로 대우해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문자나 카톡·이메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큰일이 생기는 사람은 극소수다.



알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한 무관심 필요



알 권리와 알 가치의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무식함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제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하.” 이 말을 자주 써야 한다. 소문에 느리고 스캔들에 더딘 삶이 좋은 삶이다.

이제 세상에 대해 위대한 저항을 시작해야 한다. 모두가 실시간성에 집착할 때, 한 박자 늦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야 한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는 행위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끊임없이 접속하느라 분주한 것 같지만 실은 게으른 것이요, 적극적으로 세상을 탐색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단 한 발짝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나태다. 바쁨을 위한 바쁨일 뿐이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은 세상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관심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 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 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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