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여'말고... '살아있는' 소녀들을 보고 싶다



일단 소녀 주인공이 스포츠에 입문하는 계기부터도 문제적이다. 소녀들은 스포츠를 향한 열정이나 자아실현, 출세욕이 아니라 가정 문제 때문에 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으로 유명해져서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거나 오빠가 진 거액의 빚을 대신 갚고자 한다.

이는 1980년대에 TV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끌었던 <달려라, 하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달려라, 하니> 1화는 중학생 하니가 아버지, 새엄마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하고 혼자 옥탑방을 얻는 것으로 시작한다(홍두깨 선생이 찾아와서 김치를 담가주기도 한다). 구전설화에서부터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온, '딸을 핍박하는 가족 플롯'이 스포츠 만화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설정까지 추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운동을 시작한 주인공은 수순처럼 악녀 라이벌과 만난다. 악녀들은 부유하고 예쁘지만 인성에 결함이 있는 소녀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곤 주인공에 집착하기, 질투하기, 주인공의 남자에게 눈독 들이기, 지고 나서 분노하기가 고작이다(나는 지금도 나애리가 왜 '나쁜 계집애'인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에이치투의 두 소년이 라이벌이면서도 담대한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과 비교하면 소녀 주인공과 악녀의 관계 설정은 너무나 얄팍해서, 여성의 우정을 폄하하려는 음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소녀를 내세운 스포츠 만화는 성장보다 그가 겪는 고생과 악인의 음모, 로맨스에 더 집중한다. 또 주인공이든 들러리든 간에 상관없이 운동하는 소녀의 몸은 성적으로 소비된다.

나의 바람은 좀 더 인간적이고 진지하고, 무엇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녀 주인공들을 보는 것이다. 그를 선망한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기까지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슬램덩크의 인기가 또래 남자아이들을 농구 열풍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바일 게임과 SNS의 시대에도 살아남은 저력이라면,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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