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던 때, 건강보험을 보장받기 위해 1년 남짓한 시간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냉동감자 박스를 나르던 것도, 그리즈트랩의 음식물 쓰레기를 걷어내던 것도, 한겨울에 냉동창고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아니다. 나를 아는 누군가와 매장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이 올 수도 있고 시간강사 동료들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자신이 없었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대학원 후배가 햄버거를 먹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가 갈 때까지 건자재실에 숨어 있었다. 한번은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햄버거를 먹고 있기도 했다.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 퇴근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고민하던 나는 다른 크루에게 부탁해 물류를 실어나르는 작은 승강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몇 초 후면 나는 1층에 도착하고 그가 열림 버튼을 눌러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깊고 그 시간은 길었다. 승강기는 곧 흔들리며 멈추었지만 나는 계속 하강하는, 아니 추락하고 있는 듯했다. 나의 인생은 언젠가부터 추락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왜 그렇게 두려웠느냐고 하면, 그들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추락의 심정이 되지 않을까. 그들이 그러한 마음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그들에게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교수로서만 남을 수 있길 바랐다.

 

나는 대학을 그만두기까지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내가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있노라고 말한 일이 없다. 아니, 사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다. 어느 학생과 면담을 하면서였다. 우리는 산책길을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말을 나눴다. 그는 재수를 할지, 편입을 할지,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할지, 아니면 연애라도 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새내기 대학생다운 고민을 말해왔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이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것이고,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그때 무척 슬퍼지고 말았다. 그도 이미 자신의 추락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래도, 교수님은 강의할 때 참 행복해 보여요. 애들이 교수님 이야기 많이 해요. 닮고 싶은 인생이라고요.” 나는 그때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벌을 받고 있다고 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앞엔 하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걷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였고, 곧 선배와 후배가 되었고, 이제는 다른 무엇이 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혹시, 시내의 맥도날드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저는 거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건강보험이 필요해서요. 이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아,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이제 우리는 아르바이트생과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가 나에게 답했다.

 

“그게 어때서요. 괜찮잖아요. 애들도 멋있다고 할 거예요.”

 

그때를 떠올리면 종종 울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가 친구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강의실에서 행복해 보인 나의 모습이 내가 하는 다른 일로 인해 폄하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멋진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대학에서 나와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낸다. 그중에는 한 시절 나의 노동이자 공부가 되었던 대리운전도 있다. 나는 일을 나갈 때면 아이에게 말했다. “아빠, 대리운전 다녀올게. 잘 자고 있어!” 그에게는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그가 그런 나를 닮아, 언젠가 어떠한 처지에서 살아가게 되든, 타인에게 “그게 어때서요”라고 먼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때 그의 곁에 “멋있어요”라고 말해줄 사람들이 나보다 조금 더 많으면 좋겠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8200300045

바람이나 욕망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주로 이런 환상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그것을 욕망하는 수밖에 없다. 욕망을 놓아 버리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욕망, 특히 갈망 같은 강한 욕망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장애로 작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삶에 어떤 일이 생기려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한다. 벌어진 일은 의도가 낳은 결과다. 즉 그렇게 되기로 결정한 것이 먼저다. 삶에서 생긴 일은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긴 것이다. 어떤 것을 욕망하면 사실 그것을 이루거나 얻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뭔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게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나와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마음의 거리가 생긴다. 이 거리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장애물이 된다.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자마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무엇을 원하면 그것을 받는 데 방해가 되며 그것을 얻지 못할까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욕망의 에너지는 원하는 것을 바라기만 하면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질적으로 부인한다.

낮은 의식 상태에서 목표를 몹시 힘들게 성취하는 길과 욕망을 인정하고 놓아 버려 한결 자유로운 높은 의식 상태의 길을 비교해보자. 한결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선택한 것이 수월하게 현실로 나타난다. 욕망의 감정을 항복하고, 대신에 목표를 선택해 사랑스럽게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보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놓아둔다.

왜 그것이 이미 내 것일까? 낮은 의식 상태에서 우주는 부정적이고, 거부하고, 좌절을 주고, 마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주는 모질고 인색한 부모 같다. 높은 의식 상태에서는 우주를 다르게 경험한다. 이제 우주는 잘 주고, 다정하고, 무조건 찬성하는 부모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갖게 해 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청하기만 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 이런 상태는 맥락을 새롭게 창조한다. 우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타인에게 인색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더라도 세상이 늘 그런 식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식이라고 믿으면, 삶은 그런 식으로 일을 만든다.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경험을 하면 자신의 선택이 마술처럼 삶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속에 품는 것은 현실로 나타나기 쉽다."

기이하게도 무의식은 우리 스스로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갖게 한다. 자신의 부정성과 이로 인해 커지는 왜소한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줄어들게 하고 남에게는 쉽게 흘러드는 풍요를 무의식중에 거부한다. 이것이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생긴 까닭이다. 스스로를 왜소하게 볼 때 가질 만한 것은 가난이므로,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가난을 꼼짝없이 현실로 만난다.
자신이 왜소하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내면이 무결함을 다시 인정할 때, 그리고 너그럽고, 열려 있고, 다정하고, 믿음직한 자신에 대한 저항을 놓아 버릴 때, 무의식에 의해 삶의 여건이 자동적으로 마련되어 풍요가 삶에 흘러들기 시작한다.


무의욕이나 공포 같은 낮은 의식 상태에서 벗어나면 욕망의 수준에 이른다. 전에는 '할 수 없고' 불가능하던 일이 가능해진다. 의식이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대체로 소유하는 상태에서 행하는 상태를 거쳐 존재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의식의 수준이 낮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이다. 바라는 바도 내가 갖는 것에 있다. 소중히 여기는 것도 내가 가진 것이다. 세상에서 가치와 지위가 있는 자아상도 내가 가진 것에서 얻는다.

소유할 수 있고,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며, 자기의 욕구와 자기에게 의존하는 사람의 욕구를 해결할 역량이 있음을 입증하고 나면, 마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러면 자주 어울리는 무리도 바뀌는데, 거기서는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로 나의 가치와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결정된다.
사랑하는 상태로 올라갈수록 나 자신에게 봉사하는 일보다 타인에게 봉사하는 쪽으로 점점 더 행동하게 된다. 의식이 성장하면서 사랑을 담아 타인에게 봉사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의 욕구도 충족된다. (이는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봉사는 희생이 아니다.) 결국 자신의 욕구는 우주가 자연스럽게 충족시켜준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모든 행위가 자동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된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다. 자발성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고, 뭐든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나의 내면과 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해진다. 사람들이 나와 친해지려는 이유가 내가 가진 것이나 내가 하는 일, 사회적 명성에 있지 않고, 이제 내 존재 자체에 있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질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사회에서 나를 가리키는 말도 달라진다. 더 이상 상류층 아파트나 큰 차, 잡다한 수집품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무슨 기업의 회장이나 어떤 조직의 이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매우 인상적인 사람, 사람들이 무조건 만나려 하고 알려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수준은 자조 집단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조 집단에서는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나 소유한 물건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내적 목표를 성취했는지에만 관심 있다. 정직하고, 열려있고, 나누고, 사랑하고, 기꺼이 돕고, 겸손하고, 진심이고, 깨어 있는지가 목표다. 존재하는 상태의 질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친해지고 싶어 안달할 만큼 흥미진진한 인물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인물이 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되려는 욕망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놓아 버리면 된다. 좌절과 실망만 안겨줄 사기성 약속에 넘어가 멀리 둘러 가는 일 없이, 곧장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친해지고 싶어 할 만큼 흥미진진한 인물이 되는 법은 아주 쉽다. 자신이 되고 싶은 유형의 인물을 마음에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부정적 감정과 장애물을 모두 항복한다. 그러면 가져야 하는 것 전부, 해야하는 일 전부가 자동으로 아귀가 맞게 들어온다. 소유having하거나 행doing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존재being하는 수준에서 힘과 에너지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우선권이 주어지면, 존재하는 수준은 자동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통합하고 조직한다. 이러한 기제는 "마음에 품은 대로 실현되기 쉽다." 라는 공통 경험으로 입증된다.

 

 

 

출처: 데이비드 호킨스 '놓아버림'

연애를 시작하면 한 여자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
그녀가 좋아하는 식당과 먹어본 적 없는 이국적인 요리. 처음듣는 유럽의 어느 여가수나 선댄스의 영화. 그런걸 나는 알게된다. 그녀는 달리기 거리를 재 주는 새로 나온 앱이나 히키코모리 고교생에 관한 만화책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는 화분을 기를지도 모르고, 간단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 먹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았거나 혹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의외로 송어를 낚는 법을 알고 있을수도 있다. 대학때 롯데리아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까닭에 프렌치후라이를 어떻게 튀기는지 알고 있을수도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있다. 그녀의 직장에, 학교에는 내가 모르는 동료와 친구들이 있다. 나라면 만날 수 없었을, 혹은 애초 서로 관심이 없었을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근황과 인상, 이상한 점을 건너서 전해듣거나, 이따금은 어색하나마 유쾌한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아픈 데가 있을수도 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 특정한 부분에 콤플렉스가 있을수도 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부모님과 갈등을 겪고 있을수도 있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형태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심각한 방식으로 사람을 위협한다.

그녀의 믿음 속에서 삶이란 그냥 잠시 지속되었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의 빛 같은 것일 수도, 혹은 신의 시험이자 선물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는것이 삶 자체라고, 그녀는 피로에 지쳐 있을 수도 있다. 요컨대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협하기 때문에 세상의 아주 일부분 밖에는 볼수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종교적 신념을 동시에 믿거나, 일곱 가지 장르의 음악에 동시에 매혹될 수 없는 것이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건 온전한 세계의 반쪽. 에 가깝다. 그건 너무 커다랗고 완결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오는 세상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실연은 그래서 그 세상 하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이 사라진 마음의 풍경은 그래서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밀물이 남기고 거대한 빈공간에는 조개껍질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나는 혼자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하고, 선댄스의 감독이 마침내 헐리웃에서 장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이따금 발견하고 주워 들여다보는 것은 다분히 실없지만, 아름다운 짓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러한 실연이 없는 관계-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면 그 모든 절반의 세계는 점차 단단히 나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기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의 리스트에는 그녀가 가져온 좋은것과 문제점 모두가 포함된다. 그건 혜택과 책임으로 복잡하게 얽힌 대차대조표라서 어차피 득실을 따지기가 어렵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가 최초에 나에게 가져왔던 섬세한 풍경들의 윤곽, 디테일한 소품들은 생활이라는 것에 차차 -혹독히- 침식되겠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와 몹시 다르고, 다양해서- 이따금 경이로울 것이다.

한 사람이 오는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왜 아침에 그 문구가 생각났을까.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이 댓글을 보고 생각 나 다시 찾아 읽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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