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요즘 트렌드를 생각하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꼰대로 취급받거나 다소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라는 책에서 한 말인데,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로 최근의 ‘하지 말고 놀아’ ‘대충 살아’ ‘게으르게 살자’ 류의 트렌드에 정면으로 반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삶의 성실성이 아닌 나태함에서는 결코 삶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꼰대’스럽다.

그는 인간이 ‘진정한 자발성’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발적 활동이란 고립이나 무기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활동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행동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동인형 같은 순응주의자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이란 (...) ‘자유의지로’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발적 활동’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성’과 ‘본성’이 통합된 ‘전체 인격’으로 사는 것이라 말한다. 나아가 그 핵심에는 “창조로서의 노동”이 있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일하는 삶도 비자발적인 삶이다. 자발적인 삶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실제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진정으로 사는 것이라 한다. 덧붙이자면,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환희와 기쁨, 매력을 느끼는 건 어린 아이들이 가진 ‘자발성’ 때문이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시인이자 예술가다. 언어를 창조하고, 자유롭게 그림그리며, 다양한 놀이를 자신의 힘과 자발성으로 즐긴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자발성을 얻고 싶어서, 어린아이에게 빠져든다.

나아가 우리가 아무리 나태함을 찬양하고, 자발성을 부정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는 자발적인 경험을 사랑한다고 한다. “어떤 풍경이 아름답다고 자발적으로 느낄 때, 고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틀에 박히지 않은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느꼈을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솟구쳐 오를 때” 우리는 ‘자발성’이란 무엇인지 예감한다. 삶 전체를 오로지 자발성으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자발적인 경험의 기쁨을 알고 있고,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토록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고립감, 고독의 공포, 박탈감을 이겨내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립과 좌절로 생긴 회의감이라는 것도 자발적으로 사는 순간 사라지며, 스스로 자기 삶의 완성을 위해 사는 창조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삶의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이겨내는 비결 같은 것으로 ‘자발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박탈감, 외로움, 절망감, 우울감, 고립감, 회의, 냉소 등에 가득 차 있는 시대가 지금의 우리 사회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여러 해결방안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 말대로 ‘금융치료’로, ‘입금’으로, ‘456억’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모든 문제가 하나의 이유, 하나의 방법만이 있을 리는 없다. 또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맹신하는 해결책이 반드시 유일한 만병통치약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러면, 하나뿐인 우리 삶을 놓고 약간의 배팅을 해볼 수 있다. 자발적인 삶이라는 걸 어떻게든 살아내보기 위한 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마치 해결책은 ‘456억’에 있다고 믿고 생사를 건 게임을 하는 어느 게임의 참가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도 배팅을 한다면, 그런 쪽으로 배팅을 해보고 싶다. 삶을 가능한 한 농도 짙은 자발성으로 채워보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 거기에 배팅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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